본문 바로가기

조선

나합부인 양씨 흥선대원군도 굽신하게 만든 권력 나합부인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기생이 된 인물로 조선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였연 김과근의 첩이다. 성이 양씨인데 김좌근의 애정이 거의 종교수준이라 총애를 받아 첩인데도 불구하고 세도를 누렸다. 나합부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벼슬을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권세가였다. 우리나라 몇대 요부, 요녀를 꼽을 때 나합도 들어간다. 도대체 조선말에 무슨 그리 권세가가 많고 부패가 많았는지 망한것이 이해가 갈 정도다. 나합부인이 얼마나 권세가였냐하면 나합이 이름이 아니다. 나주 출신의 정승이라하여 그렇게 불렀다. 합(閤)은 정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때문이다. 그만큼 권세가 있다는 얘기인데 김좌근이 나합부인에게 왜 세상사람들이 나합이라고 부르냐고 묻자 양씨는 합은 조개로 의미로 여자를 낮춰 부르는 의미로 자신을 그렇.. 더보기
순정효황후 조선 마지막 국모의 기개 순정효황후는 윤황후 또는 윤대비라고도 불리는 순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다. 사실상 유일무이한 황후다.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황제는 중국에서 사용한거고 우리는 왕이었기때문이다. 이에 고종이 황제 칭호를 사용했고 이후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생존해서 황후칭호를 받은 유일한 왕비다. 명성황후가 있지만 이는 민비 사후 받은 칭호다. 순종의 첫번째 아내가 죽고 순정효황후가 두번째 부인이 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정략결혼이다. 아버지인 윤택영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자신의 장녀를 황태자비로 간택되게 하기 위해 엄청난 뇌물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친일에 조선 왕비의 아버지라면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쥘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이때 순종효황후의 나이는 겨우 13살. 윤택영과 순종은 겨우 2살 차이.. 더보기
단경왕후 중종 첫사랑이지만 7일의 왕비가 되었을 뿐 단경왕후는 조선 중종의 첫번째 부인이다. 이른바 첫사랑. 중종과의 부부금술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왕후가 된지 7일만에 쫓겨났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잘못이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아버지 때문. 물론 왕후가 된 것도 아버지의 선택 덕이었지만 쫓겨난 것도 아버지의 문제였다. 단경왕후는 이조판서였던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신수근은 야망이 있었던 사람.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에게 시집보내 왕후의 자리에 앉혔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자신의 딸을 진양대군에게 시집을 보냈다. 진양대군은 훗날 중종이 되었다. 왕실과의 겹사돈을 맺으니 권세와 부귀영화가 보장될 것 같았다. 13살의 나이에 한 정략결혼이었지만 단경왕후와 진성대군은 부부 금술이 아주 좋았다. 꼬마 신랑 신부로 만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연산.. 더보기
사도세자는 왜 영조에 반항했나 사도세자는 쌀 뒤주에 갇혀 죽은 불쌍한 세자로 유명하다. 얼마전에는 '사도'라는 영화가 나와 히트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영조의 뜻을 어기고 공부를 게을리해 왕도 못되고 뒤주에 갇혀죽는 것을 아이들이 보고 느끼라고 강남아줌마들의 사도 영화 보여주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불효의 상징이기는 했나보다. 그런데 왜 사도세자는 이렇게 죽을 정도로 영조에 반항을 했던걸까?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울증이나 신경증 정도의 증상은 있었던 듯 싶다. 하지만 이는 영조가 더 심했고 오히려 영조가 정신병적인 증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영조는 자신의 이복형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한 행동들이 굉장히 난폭하고 신경질적이다. 어린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 더보기
만력제 명나라를 버리고 조선을 도운 이상한 중국의 황제 만력제는 중국 명나라의 황제 명 신종이다. 명나라를 가장 오래 다스린 왕이지만 명을 망하게 한 비난을 받는 황제다. 48년간을 통치했는데 30년간을 정무를 거부했다. 그가 특이한 점은 명을 망하게 한 원흉인데 조선을 구한 이상한 황제라는 점이다. 그래서 자국민들에게 고려천자 또는 조선황제라는 별명도 얻었다. 바로 임진왜란때 일이다. 만력제는 명나라의 정사는 등한시하고 유독 조선의 군사 파병에만 열성을 다 했다. 만력제는 임진왜란때 이여송에게 군사 4만을 주어 조선에 파병을 했다. 물론 임란의 승리는 이순신장군의 공이 가장 크지만 명나라의 참전도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때 조선이 육군은 비참할 정도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기때문이다. 만력제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 이런 만력제이다보니 중국에서는 욕을 먹고 조선.. 더보기
황희는 명재상인가? 간통과 뇌물이 실상은... 지지난해 국회의원 김진태는 황희 정승이 간통도 하고 뇌물도 받았다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조선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인지라 후손들이 발끈하여 항의를 하였다. 후에 김진태 의원은 방송에서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문제는 황희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에 놀란 일반인들이다. 그동안 위인전에서만 보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 적지않게 놀란 것이다. 정말 황희는 알려진 것처럼 명재상인걸까? 직업적으로 명재상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명재상은 맞다. 세종대왕를 보좌하며 많은 일들을 해냈고 세종대왕은 그를 비호했다. 문제가 된 사건이 불거졌음에도 황희를 중용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그를 신뢰했거나 황희가 일을 엄청나게 잘했다는 것이다. 정승직을 24년간이나 유지.. 더보기
정희왕후와 조두대 조선의 최순실게이트 정희왕후는 세조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다. 세조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예종은 겨우 16개월 만에 병으로 죽는다. 예종이 죽자 정희왕후는 성종을 왕위에 올렸는데 겨우 13살이었다. 이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정치감각은 있었으나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건 바로 까막눈이라는 것이다. 한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행정문서는 전부 한문으로 되어있어 한문을 모르는 정희왕후는 곤란했다. 물론 한글로 번역해주는 것을 보면 되지만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문을 잘 아는 여성 측근을 두었는데 이 여자가 몸종인 조두대였다. 그로인해 국정에 필요한 모든 문서들이 조두대를 거쳤고 이로 인해 다른 조직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조두대가 모든 것을 총괄하니 자연.. 더보기
현비 권씨, 영락제를 살인귀로 만들다 조선 초 중국에는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다. 중국의 속국을 자처하는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기로 결정한다. 명을 세운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는 조선에 쳐녀들을 바치라고 요구 했는데 조선의 태종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13~25세 사이 양가의 처녀를 선발했다. 참 병신같은 나라의 병신같은 왕이다. 현비 권씨에 대한 소설책도 있다 이렇게 모인 후보들에게 화장을 시켜 명에서 온 환관 황엄이 직접 뽑았는데 1등급(무슨 고기도 아니고...)으로 뽑힌 인물 중 최고 미를 갖춰 1등으로 뽑힌 인물이 권씨였다. 조선이 명나라에 공녀를 받친것은 이때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물론 원나라때는 거의 점령당했으므로 대놓고 요구하고 잡아갔다. 이후로는 병신같은 왕들이 달라는대로 아주 갖다 바쳤다. 명의 영락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