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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남편 때리는 여자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공주의 싸움 그리고 무비사건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제 1왕비로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공주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 이 제국대장공주는 성격이 무시무시했다. 고려가 원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하면서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고려왕의 왕비가 된 첫 원나라 공주다.


[몽골복식의 제국대장공주]


충렬왕은 원래 정화공주 왕씨와 결혼한 상태였고 뒤에 제국대장공주가 들어왔으나 원나라가 상국이라 제1왕비가 되고 정화공주는 밀려나게 되었다. 자신보다 무려 14년이나 늦게 시집와 자신을 밀어내니 정화공주는 억울할만 하다.



제국대장공주는 첫번째로 시집왔고 상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지 원나라의 자신의 시종들을 그대로 데리고 들어왔고 고려에서도 몽고풍습과 복장을 유지했다. 이에 고려에서는 몽골풍이 유행하기도 했다. 연회즐기기를 좋아했고 고려 조정을 무시한채 안하무인으로 마음대로 활개치며 생활을 했다.


[몽골 복식을 입은 충선왕과 신하들]


그러나 때로는 충렬왕이 자주 사냥을 나가면 국사를 돌보라고 말하기도 했고, 매우 엄하여 자신의 측근이라도 잘못을 하면 용서를 하지 않았다. 곧 충렬왕의 뒤를 이을 아들 세자 원까지 낳았으니 궁에서의 권세가 드높았다. 후에 정화공주가 딸을 낳아 연회를 베풀때는 정화공주가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정화공주 자리를 옮기게 했다. 이에 충렬왕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정화공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연회를 마쳤다.



한번은 정화공주가 무당을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한다는 익명서가 투고된 적이 있어. 이에 공주를 가둬버린 적이 있다. 또 충렬왕과 천효사에 행차할 때는 자신의 수행원이 적다면서 충렬왕을 작대기로 두들겨 팼다. 충렬왕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호사에 들어갈때는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고 또 때렸다. 그야말로 막가파였다.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으니 충렬왕은 한 궁녀에 빠졌는데 그 궁녀가 무비다. 무비는 태산군 사람 시씨의 딸로 궁에 들어오자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다. 충렬왕은 행치사 무비를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그러자 무비를 등에 없은 주변 사람들이 포악한 일들을 저질렀다. 이를 세자 원은 불만을 품고 바라봤다.


[제국대장공주]

그 즈음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병사를 했는데 아마도 향수병이 아니지 싶다. 작약꽃을 바라보다 눈물을 흘린 후 병을 얻었다는데 타지에 와 다른 문화속에 살다보니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세자 원은 이 사건을 부비를 제거하는데 이용했다. 공주가 죽은 이유가 궁녀 무비의 투기때문이라며 충렬왕에 고했다. 그리고는 공주의 저주에 가담한 무비와 그 측근, 무당, 환관 등 40여명을 참수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것이 무비사건이다.



세자 원은 충렬왕의 허락없이 총애하는 궁녀를 처단해 직접적으로 충렬왕에게 반기를 들었고 충렬왕은 이일로 상심했는지 원나라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 줄 것을 요청했다. 원나라의 허락을 얻어 세자 원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충렬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세자 원이 충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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