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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배경과 결과 요약 그리고 김주열 열사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항해 1960년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결국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혁명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다. 그중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건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었다. 이 땅에 지금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건 불과 몇십 년 전 이렇게 피 흘리며 싸워온 분들 덕이다. 

 

 

4 19 혁명 배경

4.19혁명의 배경이 된 사건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다. 그걸로 인해 4.19일에 딱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건 아니고 그 이전에 2.28 학생 민주주의 의거가 있었고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독재정권에 반한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은 이미 이전부터 있었다. 이것이 부정선거로 이내 폭발한 것일 뿐.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당시는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인식을 많이 심어줬다. 이로인해 모든 독재정권들이 그렇듯이 언론을 탄압했다. 거기에 높은 교육열로 사람들의 의식이 점점 깨어나고 있었고 학생들의 의식 수준도 뛰어났다.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은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계몽과 교육으로 인해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민주주의의 길로 가고 있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의 의식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갔다. 오직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측근들은 사라사욕을 채웠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그때는 부통령이 있었다) 자체 부정뿐 아니라 이미 그 전 선거운동부터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정과 탄압은 계속 저질러져 왔다. 그것에 반발해 2월 28일 학생들이 유세장에 올 수 없도록 학생들을 일요일에 강제 등교시킨 것에 반발한 대구 경북고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른 학교들이 호응했다.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저들의 논리는 똑같다. 빨갱이 타령.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시위는 대구 경북 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3.15 선거 때까지 발생했다. 물론 정권은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고 많은 학생들을 연행했다. 부정선거를 하지 말라는 열망이 담겨있는 시위였으나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과감하게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는데 일어난 일들을 보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투표함에 이미 이승만(정)과 이기붕(부)가 기표된 용지를 넣어놨다. 투표 독려를 위한 물품을 풀고 감시를 해 사실상 비밀투표가 아니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시민들을 겁주고 야당 참관인을 위협 폭행했다. 하는 짓이 진짜 빨갱이.

 


당연히 압도적인 승리를 넘어 북한에서나 가능한 득표율의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이 격분해 다시 시위가 일어났고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 참관인이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 투표함이 엎어져 기표해둔 종이가 들통이 나 부정선거가 적발됐다. 민주당은 선거포기를 선언했고 사람들은 더욱 격분했다. 

 

 

김주열 열사 

4.19혁명의 기폭제는 김주열 열사의 죽음인데 경찰들이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강제진압은 시위대에 총기발포. 마산에서 발생했는데 8명이 사망했고 8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자국민에게 총질은 독재자들의 종특. 사망자 중에 김주열 열사가 이슈가 된 건 그 사망 과정이 잔혹했기 때문이다.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해 사망했는데 이는 최루탄을 사람을 겨냥해 쐈다는 얘기다.

 


이것이 현장에서 발견된것이 아니라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 발각됐다. 당시 실종자로 처리된 김주열 열사는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 올랐다. 은폐하기 위해 바다에 시신을 던진 것. 당시 운전병이 증언을 자세히 과정이 자세히 밝혀졌는데 눈에 최루탄이 관통된 시신을 바다로 가져가 돌을 매달아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허술하게 처리했는지 시신이 떠올랐다. 그것이 4월 11일.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4.19 혁명 결과

4월 19일 시위는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린다.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부산과 광주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사망자가 100명이 넘었다. 이승만에게 공과가 있다고 하지만 자국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 상황인데 이승만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리더였다. 시위 희생자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당시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며 초등학생들도 시위를 하는 상황이었다.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왔으니 국민들을 그걸로 밀지는 않았다>


당일 계엄령이 선포됐고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건 군인들은 발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찰의 발포와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 앞에 결국 시위대는 진압됐다. 하지만 4월 25일 서울대 교수들의 시위로 불씨가 되살아나 번져나갔고 군대마저 이승만 정권을 지키는데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결국 4월 27일 이승만은 시민들에 굴복하여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하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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