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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노상추 일기 집념의 조선 무관 도전기

이 관직에 대한 집념

 

 

조선시대에는 뛰어난 역사서가 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 그런데 개인적으로 쓴 역사서들도 있다. 개인의 일기인데 가장 유명한 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조선시대에는 또 하나의 조선 후기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있는데 바로 '노상추'라는 인물이 1763년부터 1829년까지 무려 67년간이나 매일 기록한 일기다. 여기에는 왕의 시선이 아닌 일반인의 시선으로 쓴 생활상이 자세히 적혀 있다. 

 

 

이름이 노상추? 그는 누구인가?

이름이 상추라 좀 이상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盧尙樞 한글 이름은 아니다. 경북 구미시 선산 출생으로 18세부터 84세까지 일기를 썼다. 집념의 사나이인데 35세 이전까지 무관이 되기 위해 고생한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년에는 잘 풀려서 관직 생활을 했고 84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꽤 장수까지 했다.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글도 좀 쓰는 건데 문과가 아닌 무과에 응시한 이유는 남인 가문 출신인 데다 집안의 경제적 배경이 든든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당시는 노론이 세를 떨쳐 남인이 문과에 급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문과 지망생>


위로 형이 있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문과에 응시하려면 어느정도 집안의 뒷받침이 있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아주 흙수저는 아니었고 집안 소유의 땅도 좀 있었다. 하지만 작황도 좋지 못한 데다 밭농사를 주로 짓는 낙동강 상류지역이어서 아주 넉넉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논이 많아야 부자다. 게다가 과거시험에는 많은 경비가 들었다. 과거만 준비하다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산적 활동을 안 하니 그럴 수밖에...

 

 

 

무관 급제 분투기 

무과 시험이라고 경제적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문과 공부를 하다가 23살때 문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무예 수련을 했는데 그래도 미련이 있어 애석해했다. 무과시험에는 시험 도구로 활을 사용했는데 활을 직접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활이 비쌌다. 송아지 한 마리 값은 되었다. 노상추는 겨울 동안 화살 5,000발씩 쏘며 연습했는데 이 양이 많은 데다 한양을 오가며 여러 번 응시하고 낙방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소비했다.  

 

 

무과에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771년 두번 정시에 모두 낙방. 1775년에는 영조의 사망으로 정시 취소, 1777년 초시에 합격했지만 복시에 낙방, 1778년에도 낙방했다. 1779년 합격 후 1780년 선무 도시를 치르고 무과에 급제했다. 그 사이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일기에 의하면 "논 아홉 마지기(1,800평), 밭 90마지기(18,000평), 돈 50냥이(오천 만원) 10년 과거 준비에 모두 들어갔으니 앞으로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공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라고 적혀있다.

 

 

급제를 했어도 잘 풀린 건 아니다. 그 뒤로 4년동안 관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합격자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던 데다 역시나 영남 남인 출신으로 임용에 계속 탈락했다. 결국 살림도 궁핍한데 무관 고위직을 찾아가 로비를 해야만 했다. 결국 임용되기는 했지만 중앙과 지방의 말단 무관직을 전전하며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쥐구멍에 볕들 날이 있듯이 1793년 활쏘기 테스트에서 정조의 눈에 뛰어난 솜씨가 눈에 띄어 파격적으로 정 3품 관직을 받았다. 마치 운이 좋아서 그런 것 같지만 사실 그가 무예 솜씨를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시대 무관은 활쏘기가 굉장히 중요했다. 그 뒤로 좀 평탄한 무관의 길을 걸으며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말년이 될 때까지 딱히 문제가 되는 점이 없이 후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사실 일기가 가장 큰 업적) 말년을 편안하게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중인 일기. 양이 꽤 많다>

 

노상추 일기의 가치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의 일기가 아니라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는 당시 무관의 일상과 환경에 대해 조선후기의 사회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과에 합격한 후 장년기에는 관직생활과 타향에서 보낸 것에 대한 내용이 있고 후반기에 문중과 가족에 대한 생활상이 적혀있다. 청년기와 노년기에 조선시대 미시사, 민속사,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고 장년기는 관직과 관련된 사회 연구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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