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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축지법을 썼다던가... 보부상 이용익

이용익은 대한제국 시대의 관료이면서 독립운동가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전주고 이성계의 이복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이다. 집안은 그렇지만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는데 집이 가난해 보부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그가 과료로 출세한 데는 임오군란 당시 민영익을 구하고 민비의 구출에 도움을 준 공로로 민씨 정권의 비호를 받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출세를 위해 민씨 측에 붙었지만 무조건적인 기회주의자는 아니었는지 친일파는 아니었고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보부상이었지만 이건 생계의 수단이었을 뿐이고 금광 찾는 것에 빠져 있었다. 버려진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생계가 막막해지면 보부상일을 했다. 이렇게 한 보부상 일이지만 이것도 적성에 맞았는데 발이 엄청나게 빨랐다. 아니면 보부상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발이 빨라진 건가. 나중에 이것은 출세를 위한 유용한 재능이 된다.

마침내 금광에서 금을 캐내자 이것을 가지고 민영익 집에 식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광의 정보를 주며 민영익과 친분을 쌓았다. 후에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영익의 집으로 쳐 들어오는 군사를 피해 그를 업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고 한다. 그게 어찌나 빨랐는지 군인들이 그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을 둘러업고 뛰는 사람을... 장호원으로 피신해 있던 민비와 고종 사이에 연락업무도 맡았다. 연락 방법은 그 특유의 빠른 발을 이용한 서신교환. 장호원은 경기도 이천으로 서울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여기를 하루새 왕복했다고 한다. 가능한가? 이 정도면 축지법.

전해져 오는 얘기에 의하면 뒤에 그의 축지법을 인증 받는 사건이 있는데 민영익이 이용익을 고종에게 천거하면서 축지법을 쓴다고 말했다. 고종은 그 말이 사실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전주 목사에게 파발을 보내고 이용익이 친서를 가지고 도착하는 시간을 재라고 했다. 이용익은 왕의 서신을 가지고 나흘 뒤 출발했는데 전주 목사가 인증한 비공인 기록에 의하면 12시간이 안되어 도착했다고 한다. 전주는 지금 고속도로 기준으로 경복궁에서 214km가량 떨어진 거리다. 

 

 

이 속도는 백미터를 20초 정도로 12시간 달린 속도로 마라토너의 속도인데 이걸 종일 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볼 때는 축지법으로 볼만하다. 이게 사실이라면 비공인 세계 기록일 듯.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과장된 면도 있을 것 같다. 일제시대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에 자전거를 타고 간 것을 보고 와전되어 그가 독립문을 뛰어넘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돌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탔다고 전해지는 서재필박사>

어쨌거나 엄청나게 발이 빠른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고속도로 거리로 214km지 국도로 가면 270km고 그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와 산길을 달렸을 터였다. 그러니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빨랐을 것 같다. 어쩌면 정말 비공인 세계기록일 듯하기도 하다. 그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발은 보이지 않고 휘날리는 두루마리 자락만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람 사이에 말이 퍼지면서 과장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고려대의 전신.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전문학교>

그래도 완전한 과장은 아닌 것이 이 재능을 인정받아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진짜 축지법을 익혔따면 후학이라도 양성하지... 그는 원래의 꿈인 금광 개척에도 열중해 많은 부도 손에 쥐었다. 하지만 보부상 출신의 성공에는 양반 기득권층의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자무식이라는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사실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친러파의 대표적 인물로 을사늑약 이후 러시아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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