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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장영실의 미스터리한 말년

어렸을 적 세종대왕만큼 대단하게 생각 된 인물이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조선시대 기술자로 지금으로 치면 과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대단하게 여겨졌던건 신분상승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영실의 그의 기술로 세종에 의해 신분상승을 이루었다.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는 TV에도 많이 나오고 '바람돌이 소년 장영실'이라는 어린이 드라마도 있었다. 아마 많은 어린이들이 장영실 이야기에 과학자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노비의 신분으로 세종에 발탁되어 벼슬도 했으니 어마어마한 재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노비를 발탁한 세종대왕도 대단하지만 장영실도 굉장한 인물로 비춰졌었다.


<현대에 그려진 장영실의 영정 그림>


그런데 어린 시절 알고 있던 장영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다. 세종의 일을 하며 많은 위대한 발명을 하고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 줄 알았다. 나중에 커서 장영실의 미스터리한 말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장영실의 인생은 어릴적 동화속 얘기처럼 해피엔딩은 아니다. 나중에 세종대왕에 의해 이상한 이유로 궁에서 쫓겨났으며 노비출신이라 그런지 이후 행적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다.



지금의 충남 아산에서 기녀의 소생으로 부산 동래현의 관노로 있었다. 어렸을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하는데 그가 어릴 적 자란 부산에는 지금은 부산과학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장영실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금속제련, 성곽 축조, 농기구, 무기 수리 등에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동래현의 가뭄을 수차를 개발해 해결할 정도로 실무적인 기술과 발명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세종이 알고 한양으로 부른 것이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천문기기 제작과 왕실의 물품 제작, 수리를 하는 상의원 별좌에 임명했다. 그는 한양에서 세종의 지원을 받으며 많은 일을 해냈다. 천문기구 간의대나 혼천 시계를 만들고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감독했고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도 만들었다.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를 만들고 공공장소용 앙부일구를 만들었다. 우량계인 측우기와 범람여부를 알 수 있는 수표도 만들었고 수많은 발명을 해냈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


여기까지만 보면 노비에서 벼슬을 하고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된 해피한 이야기인데 말년은 정말 이상하다. 어린이 이야기에는 이 사실이 안나와 모두 장영실이 잘 된거로 끝난 줄 알지만 세종에 의해 쫓겨난다. 임금의 가마제작을 했는데 그 가마가 파손되어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가마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장영실도 아니었다. 장영실은 그냥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불경죄로 의금부에서 장형을 맞고 파직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장영실을 지지해주던 세종도 이상하게 장영실을 내치게 되었다. 세종이 추진했던 천문사업이 종료되어 자기의 역할을 다한 장영실이 더이상 필요 없어 내보내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를 씌워 장을 때리고 내쫓는 건 말이 안된다. 장영실은 천문분야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조선 과학 기술과 농업생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역할을 다했다고, 가마가 부서졌다고 내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기록되지 않은 참형을 당할만한 중대한 사고를 쳤는데 고심하던 세종이 주변의 직언을 물리치고 장형만 쳐서 내보낸 것은 아닐까? 승승장구하던 생에 정말 미스터리한 말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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