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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단경왕후 중종 첫사랑이지만 7일의 왕비가 되었을 뿐

단경왕후는 조선 중종의 첫번째 부인이다. 이른바 첫사랑. 중종과의 부부금술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왕후가 된지 7일만에 쫓겨났다.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부모의 잘못이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아버지 때문. 물론 왕후가 된 것도 아버지의 선택 덕이었지만 쫓겨난 것도 아버지의 문제였다.



단경왕후는 이조판서였던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신수근은 야망이 있었던 사람.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에게 시집보내 왕후의 자리에 앉혔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자신의 딸을 진양대군에게 시집을 보냈다. 진양대군은 훗날 중종이 되었다. 왕실과의 겹사돈을 맺으니 권세와 부귀영화가 보장될 것 같았다.


드라마 속 단경왕후


13살의 나이에 한 정략결혼이었지만 단경왕후와 진성대군은 부부 금술이 아주 좋았다. 꼬마 신랑 신부로 만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아래 진성대군은 그리 기를 펴지는 못했다. 연산군의 폭정과 그를 끌어내리려는 반란 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드디어 반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난 군사들에 의해 진성대군은 궁으로 모셔져 갔다. 타의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단경왕후도 자연스럽게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왕과 왕비가 되었으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 아래에서 권세를 누렸기때문에 반란군의 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신수근은 권력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기는 했어도 지조는 있었는지 반정군의 대장인 박원종이 반정에 참여를 권유했을 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했다. 박원종은 무혈입성을 하려했으나 일이 틀어지자 급하게 반정을 일으켰고 신수근도 죽인 것이다.



이제 그 칼끝은 단경왕후에게도 겨눠졌다. 박원종 일파는 죄인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다하여 단경왕후를 쫓아낼 것을 상소했다.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며 중종은 반대했지만 타의에 의해 이제 막 왕이 된 중종이 무슨 힘이 있을까. 압력에 의해 그녀는 7일만에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단경왕후에서 폐비 신씨가 된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단경왕후를 잊지 못했다. 싸우고 헤어진 것도 아니고 압박에 의해 억지로 떨어진 정이 사라질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첫사랑. 궁에서 나와 사가로 쫓겨난 단경왕후를 보고 싶어 누각에 올라 본가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 중


단경왕후는 어땠을까?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다. 뒷산에 올라 혹시 중종이 볼까 자신의 붉은 치마를 바위에 걸쳐 놓았다. 단경왕후가 있는 곳에서 궁궐은 아른아른 사람들이 보이는 위치였다. 아마 중종도 그 치마를 보며 마음을 달랬을 지도 모르겠다.


단경왕후의 묘 양주 온릉


중종이 병환으로 승하할 때야 단경왕후를 궁으로 불러들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7일간 왕비자리에 머물렀던 단경왕후는 망한 집안인지라 친척집을 전전하며 70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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