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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흥선대원군이 된 파락호 이하응

조선 말기의 절대적 권력자 하면 흥선대원군이 떠오른다. 흥선대원군은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쇄국정책으로 근대화를 늦췄다는 원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점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는 것도 같다. 또 하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파락호다. 파락호는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 말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흥선대원군의 본명은 이하응. 하지만 흥선대원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차남인 어린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끈 추존왕이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파락호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정도까지 막장 생활은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기방을 출입하다 욕을 당하고 상갓집의 개라고 불릴 정도였다는데 사실 이하응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의해 이씨 왕족이 견제를 당하자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했다고 한다.


<드라마 닥터진에서 파락호 행세하는 이하응>


이는 세도가들의 눈밖에 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로 시장통에서 상인들과 어울려 놀며 난봉꾼 행세를 하고 다녔다. 세도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관직을 청탁하기도 하는 등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일부러 했다. 이렇게 기회를 노리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 하자 고종을 왕으로 세우며 스스로 세도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 했던 파락호 생활이 나중에 정치를 할 때는 득이 되었다. 시장통을 누비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민심과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지식이 정책을 펼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들이 서원을 철폐 및 정리하고 양반 기득권 토호들의 민폐를 없앤 것, 양반들도 세금을 내는 호포제를 시행한 것 등이다.



문제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비와의 권력 다툼으로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쇄국정책은 잘 못한 일이라는 의견과 반대 의견도 있다. 반대 의견은 이미 시대 상황이 개방하면 그대로 외세에 먹혔을 거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일본에 먹혔으니 이래 저래 먹히는 건 마찬가지. 외세의 힘 없이 독자적으로 힘을 키웠으면 좋았겠지만 시대 상황이 그렇지도 못했고. 혹시 흥선대원군이 다른 시대를 살았거나 적통으로 왕이 되었다면 달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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