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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시가전 지옥의 3일


한국전쟁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작전인 인천상륙작전. 이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버렸다. 흔히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러 연합군이 파죽지세로 몰고 간거로 알지만 서울 탈환은 꽤 힘든 일이었다. 지옥의 3일이라고 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전을 해서 서울을 탈환 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후 인천을 탈환하고 맥아더는 서울을 수복하는 것이 인천상륙작전의 결정적인 후속조치라 판단했다. 이제 서울로 진격해 갔는데 1950년 9월 18일이다. 김포공항은 어렵지 않게 점령했으나 서울을 기필코 방어하려는 북한군은 부산에 있던 18사단과 낙동강에서 싸우고 있던 경험많은 9사단까지 긴급하게 끌어올렸다. 


서울 진군 경로

9월 20일 영등포 외각에 미 해병대들이 포진했고 21일 6시 30분에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며 영등포 전투가 시작되었다. 2일간을 치열하게 주고 받으며 인민군 제87연대가 퇴각하기로 결정할때까지 계속되었다. 맥아더는 북한 침공 3개월째인 9월 25일까지 상징적인 의미로 서울을 수복하길 원했다. 스미스가 지휘하는 제1 해병대는 많은 희생을 치루며 인민군 1000명이 지키고 있던 서쪽 산등성이까지 점령했다.


9월 25일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한강북쪽에 보병을 배치하고 전투를 개시했는데 이때부터 지옥의 3일이라 불릴 정도로 강도높은 시가전을 벌였다. 25일 오후 중반까지 남산을 신속하게 탈취했고 해병대는 서울 중심으로 진격했다. 목표는 서울에 있는 대사관들이었다.



인민군은 주요 거리를 따라 300~400야드(약 270~370미터)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모래주머니를 잔뜩 쌓아 대전차포와 기관총을 배치하고 방어했다. 전복된 자동차 전차 등 온갖것들로 다 방어막을 쳤다. 바리케이드 바깥 가장자리에는 저격수를 배치했다. 


인민군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는 미군


사진기자 데이비드 더글러스에 증언에 의하면 숨어있는 적군이 꾸준히 미 해병대를 공격했고 서울의 모든 건물에는 저격수가 있었다고 한다. 퇴각을 염두해두지 않은 일종의 자살 공격인데 2차대전에서 참여한 해병중위는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극단적인 방어에 직면한 1해병대는 25일 불과 2킬로미터 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공식적인 서울 수복 기록이 26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위에서 얘기한 상징적인 의미로 밀어붙인 듯 하다. 알몬드 군단장이 25일 오후 2시 수도 해방 공개성명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인민군 방어를 뚫기 위한 해병대의 포격과 진격은 계속되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인민군은 옥상, 나무 등에서 징하게 저항했다.


불타는 건물의 엄청난 열기가 지옥의 악몽을 더했고 미군 탱크에 대한 자살공격이 반복적으로 있었다. 미군은 M-26, M4A3탱크를 활용해 바리케이드를 부쉈다. 하나의 바리케이드를 제거하면 또다른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야전이 아닌 시가전인 관계로 많은 민간인들까지 피해를 입었다. 인민군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서울은 파괴되어 갔다. 미군 내에서도 폭격과 포 지원을 하자는 쪽과 너무 많은 민간인들이 지옥을 경험할거라는 쪽이 대립했다.


시가전에서 건물위의 인민군 저격병을 공격하는 미군


그러나 서울을 수복한다는 목표에 화력을 이용하는 쪽이 우세했고 도시는 65%가 파괴되었으며 수천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 맥아더도 최소한의 부수적인 피해를 막는 것보다는 속전속결로 서울을 수복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사실 맥아더는 서울에 와보지 않았고 알몬드 군단장이 실질적인 지휘를 했기때문에 서울 탈환작전에 대한 비난도 알몬드가 받게 되었다.


알몬드는 서울을 우회하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인민군의 항복을 강요하는 직접적인 전투만을 고집했다. 이로 인해 더 수복이 느려졌다고 역사학자인 로버트 레키는 보고 있다. 알몬드가 서울을 공격할 것에 대한 결정으로 제1해병대는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항복한 북한 인민군


알몬드는 25일~26일 밤 서울 중심부로 공격을 명령했다. 인민군이 의정부 북쪽으로 도주한다는 보고가 나왔을때도 적군의 철저한 파괴를 위해 즉각적인 진격을 명령했다. 실제 인민군이 서울에서 철수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적대적인 공격이 그 보고가 있은 밤에도 도시의 서쪽과 마포대교쪽에서 제3대대, 제5해병대, 제3대대, 제1해병대에게 가해졌다. 제 25여단은 이에 탱크와 자주포로 맹렬히 공격했다.


미해병의 포격에 불타는 탱크


26일 새벽이 되기 전 인민군은 서울 가장자리에 있는 산악에서 32보병대의 기지를 공격했다. 32보병대는 인민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큰 사상자를 냈다. 마포대로에서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하던 풀러의 해병대는 겨우 1.6킬로미터의 땅만 얻을 수 있었다.


서울 수복

머레이의 5해병대는 27일 아침 서울 북서부 지역의 도시 거리로 침투하기 전 낮은 언덕을 하나를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서울 수복작전을 하던 군단은 한국 수도의 약 절반을 점령했다. 서울역도 아침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  알몬드가 25일 서울 수복을 조기 선언한 이후로도 3일 동안 엄청나게 많은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거이다. 그래서 지옥의 3일이라고 한다. 고지전에 나온 것처럼 휴전을 하고도 치열하게 공방전을 한 것처럼 역시 정치와 전투는 별개다. 


폐허가 된 서울


서울은 완전 폐허로 변한 도시가 되었다. 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처참한 수준의 생존자들에게 충격을 받았다. 제 1대대의 모건 브레나드 일병은 도시가 말그대로 지옥으로 떨여졌다라고 회상했다. 다른 병사는 사방에 야생동물과 쓰레기를 뒤지는 짐승들이 있었다고 했다. 27일 오전 1해병은 프랑스 대사관을 탈환했고 오후 미국 대사관을 찾으며 수복선언을 한 후 3일만에 실질적으로 서울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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