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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순정효황후 조선 마지막 국모의 기개

순정효황후는 윤황후 또는 윤대비라고도 불리는 순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다. 사실상 유일무이한 황후다.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황제는 중국에서 사용한거고 우리는 왕이었기때문이다. 이에 고종이 황제 칭호를 사용했고 이후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생존해서 황후칭호를 받은 유일한 왕비다. 명성황후가 있지만 이는 민비 사후 받은 칭호다.


입궁할 당시 순정효황후


순종의 첫번째 아내가 죽고 순정효황후가 두번째 부인이 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정략결혼이다. 아버지인 윤택영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자신의 장녀를 황태자비로 간택되게 하기 위해 엄청난 뇌물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친일에 조선 왕비의 아버지라면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쥘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이때 순종효황후의 나이는 겨우 13살. 윤택영과 순종은 겨우 2살 차이니 목적있는 결혼이 아니고서야 이런 결혼을 할리 없을 것이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혀황후, 덕혜옹주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때문에 일본은 강압적으로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게 했다. 따라서 순종이 황제가 되고 순정효황후도 황후가 된것이다. 최초의 황후이자 마지막 황후다. 순정효황후는 나이는 어렸지만 현명하고 속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어머니인 민비와 순헌황귀비 엄씨가 무속에 빠져 허구한날 궁에서 굿판을 벌인데 비해 순정효황후는 무속을 멀리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순정효황후는 안락한 궁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황후가 된 후 4년이 채 못되어 1910년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조정의 친일매국노들은 순종황제에게 한일합방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을 강요했다. 그 아비가 개새끼여도 순정효황후는 그 매국유전자를 물려받지는 않았나보다. 어전회의에서 매국노들의 강요를 엿듣던 순정효황후는 옥새를 자신이 치맛자락속에 숨겨 조약서에 옥새를 찍지 못하도록 했다.


친일매국노 윤덕영


제아무리 매국노 잡종들이라도 양반입네 하고 벼슬자리 하고 있는 것들이라 일말의 품위는 있었는지 함부로 황후의 치마를 들출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이들보다 더 호로잡종이 있었으니 바로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이다. 이놈은 경술국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매국노 위의 매국노. 그야말로 뼈속까지 친일인 잡종이다. 머리가 커서 별명은 대갈장군. 이런놈이 양심이나 품위따위는 있지 않을 터. 순정효황후의 치마속에 손을 넣어 옥새를 빼앗았다. 나라를 지키려는 마지막 국모의 기개도 매국노의 완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순정효황후의 환궁


나라를 빼앗기고 순종도 죽고 난후 순정효황후는 이왕비로 격하되었고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머물며 대한민국의 독립도 보고 정부수립도 지켜봤다. 이승만은 낙선재에 있는 황실사람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본인이 왕이되고 싶어했으니 그럴만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 혼자 살겠다고 한강다리 폭파시키고 도망가 서울에 남은 시민들과 함께 인민군 점령하에 또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인민군이 궁도 점령했지만 관리인이 인민군에 부역하며 보호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가산을 인민군이 모두 빼앗아가 궁핍한 생활을 하다 서울이 수복되자 다시 낙선재로 돌아왔으나 또다시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그 후 휴전이 되었지만 다시 낙선재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승만이 창덕궁이 국유재산이라며 허락하지 않아 정릉의 인수재에서 지냈다. 후에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나서야 낙선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한민국 근대사의 격동의 세월을 모두 겪은 후 1966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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