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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지식 티움/밀리터리

일본 패망에도 끝까지 정신 못차렸던 일본군들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다. 2차 세계 대전의 종료였다. 일본은 망한 날이고 우리나라는 광복이 된 날이다. 이소식을 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환호했다. 친일파들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일본인들은 좌절했다. 어떤 일본인들은 이를 애써 부인했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일본군에서는. 그리고 엉뚱한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상황이 급변하면 이런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만주에서 대규모 일본인들은 두가지 선택을 했다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731 부대


히로시마에 원폭이 있고 일본인들은 공포에 빠졌다. 소련은 만주로 내려 오고 있었다. 만주에는 1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의 미래는 암울했다.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알고 있었다. 731부대를 만들어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체실험했다. 분명 전쟁에 패배한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웠을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다. 특히 군인들. 자신이 자결하기 전에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자결한 군인도 있었지만 혼자 자살한 군인들도 많았다. 남겨진 일본인 여성들은 중국인 가정에 아이를 맡기기도 했다. 또 여성들은 살기 위해 중국인과 가정을 꾸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렇게 중국에 머문 여성이 만여명이었다 



  일왕의 항복을 막으려는 세력이 있었다

켄지 하타나카


히로히토 일왕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할 것이라고 하루전에 발표했다. 그런데 일부 일본군 장군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부는 서명을 했지만 일부는 이에 반발했고 계속 전쟁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켄지 하타나카 소령은 항복선언을 녹음한 내용이 방송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당들과 무장을 하고 일왕궁에 침입했다. 경비병을 제압하고 몇 시간을 녹음한 것을 찾기 위해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새벽녘 마타사카 아이다 중령은 그를 대면하고 항복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는 궁에서 도망쳤다. 하타나카는 라디오방송국에 침입해 직원을 붙잡고 협박했다. 라디오 방송으로 전쟁을 독려하려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이를 거부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방송국을 나와 오토바이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뿌리며 도망쳤다. 하타나카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쏴 자결했다. 그가 자결한 1시간 뒤 일왕의 녹음이 플레이되었고 일왕의 항복 메세지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끝까지 카미카제를 보냈다.


큐슈의 함대 사령관 마토메 우가키는 미국 함대에 카미카제 공격을 명령해 수백명의 사장자를 냈다. 일왕의 항복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카미카제에 합류하기로 했다. 자신이 부하중 한명이 모는 전투기에 몸을 싫고 9대의 전투기와 함께 미 해군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쪽의 사격을 받고 바다에 추락했다. 



  미군 포로들을 학살했다

일본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일왕이 항복소식이 전해지자 큐슈의 수용소에 있던 16명의 미국 공군 대원은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 수용소에서 그들은 살아있는채로 해부당한 동료도 보았고 화학실험을 당한 동료도 있었다. 이 모진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그들은 기뻤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들을 곱게 남겨두려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포로를 밖으로 끌고가 일본도로 참살했다. 그와 같은 일을 한 한 일본군 병사는 나중에 진술에서 자신이 한 일이 나라와 조상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디 미군 뿐이었을까 일본군은 곳곳에서 이런일을 자행했다. 


 

  끝나지 않은 게릴라 전

항복하는 사케 오바


사케 오바 사령관은 일본이 항복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히로시마가 원폭에 초토화된 사진을 보여줬지만 그는 그것을 조작이라고 여겼다. 그는 일본은 이기기 위해 전쟁을 했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46명의 병사와 160명의 민간인을 데리고 평야로 가 게릴라전 훈련을 시켰다. 3개월 뒤 사이판에 있는 미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의 우마하치 아모 소장은 오바를 추적했다. 12월 1일이 되어서야 숲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항복하라는 서면 명령서를 전달했고 그제서야 그와 부하들은 미군 기지로 가서 항복을 했다.



  29년을 싸운 병사

명령을 받는 히루 오노다


일본이 항복했을 때 필리핀 전장에 있던 히루 오노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직접적인 전투를 중지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때문이다. 오노다는 필리핀 정글에서 바나나와 코코넛을 먹으며 살아남았다. 때때로 마을 사람들을 습격했다. 1974년이 되어서야 요시미 타니구치 지휘관이 필리핀으로 날아가 그에게 항복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렸다. 그는 필리핀 대통령에게 가 항복을 하고 29년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제 정신이었던 몇 안되는 군인 히로시 야마사키

그는 100세 넘어서까지 환자를 진료했다


히로시 야마사키는 수의사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1937년 천진에 도착해 6개월간 전쟁에 이용된 동물들을 치료했다. 그는 그의 동료 군인들인 중국 민간인들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자괴감을 느꼈다. 한 일본 군인이 아기를 목 졸라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 아이를 구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탈영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쪽으로 달렸다. 그는 도중에 피로로 쓰러졌고 중국인 가족이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주고 건강이 회복되도록 돌봐줬다. 야마사키는 산동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을 치료했다. 일본이 항복을 했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중국에서 일본군이 중국에 한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치료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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