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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선의왕후 vs 영조 형수와 시동생의 집안싸움

선의왕후는 조선 경종의 왕비다. 14살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경종과 선의왕후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경종은 몸이 약했고 세자를 책정하려 했으나 아이가 없었다. 이에 노론 4대신과 왕대비였던 인원왕후는 경종의 배다른 동생 연잉군을 후임으로 책봉했다. 이 연잉군이 후에 영조다. 일이 이렇게 되니 자신의 아이를 왕으로 만들지 못한 선의왕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드라마 장희빈의 선의왕후 어씨


영조는 적통이 아니었다. 무수리의 아들이라 이것은 그에게 평생의 콤플렉스였다. 이런 영조가 세제로 책봉이 되자 선의왕후는 비밀리에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며 하교를 내렸다. 그럼 선의왕후는 후사도 없는데 뭐하러 이렇게 신경을 쓴걸까?



선의왕후는 아무래도 권력욕이 있었나보다. 아니면 적통이 아닌 영조가 그냥 미웠던지. 연잉군이 뒤를 잇는 것을 반대하여 종실과 연합해서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아니면 그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했다. 그러니 이 계획은 경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노론에 의해 영조가 세제로 책봉


경정은 몸이 극도로 허약해서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일도 있었다. 간질과 발작 증세도 있어 급사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독살설도 있다. 그 배후에는 영조가 있다. 영조가 왕에게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라고 말했는데 이 두가지 음식은 상극이라 몸이 허약한 사람이 먹으면 잇아 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 음식을 먹은 후 야밤에 피를 토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부인했다.



어쨌거나 경종 급사 후 영조가 왕이 되었는데 당연히 선의왕후는 좋을리가 없었다. 20세에 왕대비가 되었지만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종종 거부했고, 이에 대해 영조는 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삭감하며 응수했다. 


사도세자를 죽게 한 바로 그 콤플렉스 덩어리 아버지 영조


선의왕후를 위해 진연회를 베풀자는 홍치중의 주청에도 영조는 진노하여 거부했다. 거듭되는 청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연기하는 등 선의왕후와는 좋지 않은 관계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형수와 시동생의 집안싸움이었다. 스케일이 좀 컸을 뿐 이런 일은 집안에서 종종 일어난다.


선의왕후는 병사했는데 죽기 직전 몸을 떨며 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상한 병 증상을 일으키며 죽은 이면에는 영조 암살기도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고 분하고 억울해 식음을 전폐하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선의왕후가 죽은 후에도 영조는 국상 기간 중 후궁 숙의 이씨를 빈으로 삼고 혼인잔치를 열어 뒤끝작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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