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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광해군과 인조반정

한동안 광해군 다시보기 붐이 일어 영화도 나오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이 폭정을 일삼은 폭군이 아니라 합리적인 외교와 정책으로 자신의 정치를 하려하다 사대주의자들에게 임금 자리를 빼앗긴 불운의 왕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 자리를 빼앗은 쿠데타가 인조반정이다.


영화 광해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알고 이를 초월한 정치를 하려고 했다.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나왔듯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낀 조선에서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했다. 그러나 이는 명 사대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자들은 간, 쓸개 다 내어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러나 광해군이 성군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외교적으로는 합리적인 정책을 폈으나 민생에는 취약했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 궁궐공사와 수탈을 부추기는 짓을 했고 결정적인 건 패륜적인 사건들 때문에 반대파의 명분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였고 인목왕후를 폐위시켰다. 



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반정을 모의해 능양군(인조)를 주축으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2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진격했는데 미리 포섭했던 이흥립이 궁궐문을 열어주어 쉽게 입성할 수 있었다.


이때 광해군은 궁궐의 뒷문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야밤에 도주한 걸 보면 왕으로서 떳떳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망간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곧 붙들렸고 왕이 아닌 왕자의 신분, 군으로 강등 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이다. 강화도로 유배 되었는데 측근 40여명이 참수되고 200여명이 숙청되었다. 



철저하게 반대파를 압살한 인조는 이정도 했으면 제대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겠건만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왕이 되었다. 명의 사대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명으로 부터도 그다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했다.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계기가 되었고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하는 치욕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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