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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의 이혼고백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로 알려져 있는 사람은 정월 나혜석이다. 1896년생으로 부잣집에서 태어나 그때 당시에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게 신교육을 받고 자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패미니스트로 평가받으며 이 분야이 선구자이다.


예술가로서도 유명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으로 여성운동가였다. 그때 당시의 여성들이 가부장적사회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살아간 반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 선구자적인 신여성의 표본이었다. 여자도 인간이라 외치며 인간으로 대우해달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했다.


나혜석의 자화상


그녀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명절이 여성들에게는 고단한 날임을 고발했다. 이게 무려 80여년전의 일이다. 지금도 명정증후군으로 여성들이 일을 하는데 시대를 앞서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혜석은 가부장적인 유교이념 아래에서 순종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해방을 원했다.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그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조는 취미다라고 외친 인물이다.



그녀가 이혼을 한 후에 1934년 발표한 이혼고백서는 파격적이고 남성우위 사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치열한 사회운동이었다. 이 고백서에서 정조를 둘러싼 비합리적인 사고를 고발했다. 그 구절은 이렇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한다' 또 자신과 최린의 관계를 진보된 사람으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감정이라고 항변했다. 이 이혼고백서는 원고지 1500장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글이다. 



남편과의 이혼과 밀회를 했던 최린에게 차인 후에 발표했던 이 이혼고백서는 큰 파장을 낳았다. 최린은 유부남이었다. 최린에게 차인 후 그를 정조 유린으로 고소했다. 하지만 시대는 여성의 편이 아니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후 외롭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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