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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청나라 악녀 서태후 함풍제의 권력을 이어받다

서태후는 청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은 황태후로 유명하다. 말아먹었을 뿐 아니라 희대의 악녀였다. 이런 여자가 섭정까지 했으니 청나라가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었다. 서태후는 원래 청나라 9대황제 함풍제의 후궁이었다. 진짜 마지막 황제는 서태후의 아들인 그런 그녀가 권력을 잡고 나라를 망친 것이다. 권력을 행할 당시 행실을 보면 남의 나라 황태후지만 욕이 절로 나올 정도다.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편법들을 이용했다.



서태후는 원래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다. 함풍제가 죽고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즉위했는데 이는 원래 황후인 뉴고록씨가 아들이 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 후궁인 서태후의 아들이 즉위를 하게 도었고 뉴고록씨와 서태후가 모두 황태후로 추대되었다. 서태후는 자희태후, 뉴고록씨는 자안태후라는 휘호를 받았으나 사람들은 자금성의 서쪽에 사는 자희태후를 서태후 동쪽에 사는 자안태후를 동태후라고 불렀다.


함풍제

서태후는 함풍제의 낮은 등급에 해당하는 후궁이었으나 원래 권력욕이 있는지 함풍제의 국사에 참견을 했다. 함풍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 서태후는 그저 그런 후궁으로 남을 뻔 했으나 함풍제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 후사가 없던 터에 낳은 아들이라 서태후는 1급 후궁으로 승급이 되었다.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서태후에게는 권력이 없었다. 이는 함풍제가 섭정을 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하여 8명의 고명대신들이 대신 섭정을 하게 되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서태후는 신유정변을 일으켜 강제로 정권을 빼앗았다. 후에 동치제가 사망하자 자신이 할머니가 되어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살난 조카를 자신에게 입양해서 황제로 삼았다. 이가 광서제다.



서태후는 죽을때까지 청나라를 통치했는데 나름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개혁을 한 것도 있지만 문제는 서태후의 권력남용이다. 서태후는 매 끼니 엄청난 산해진미를 먹었는데 그 예산이 당시 중국 농민이 1년동안 먹는 끼니의 액수와 맞먹었다고 한다. 한번 신은 버선은 신지 않았고 옷은 3000상자에 이르렀다고 한다. 옷을 자주 갈아입는 건 누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아뭏든. 또 이화원이라는 정원을 건설하는데 엄청난 국가예산을 낭비했다. 


이화원이에 물놀이 하는 서태후


더 황당한 건 서태후가 미소년 덕후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권력까지 있으니 미소년들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마음에 드는 미소년들을 이화원의 낙수당에 가둬놓고 동침을 한 남자는 소문이 새나가지 않다록 죽였다고 한다. 혈기 왕성한 미소년들이라 궁에 비아그라같은 정력제는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서태후의 삽질 정치로 이미 청은 서구 열강의 손에 거의 넘어가고 망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어다. 광서제가 죽고 다음날 서태후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황제로 지명하고 본인도 죽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권력을 손에 놓지 않은채로. 


서태후의 죽음은 본인의 74세 생일에 몇날 몇일간 계속된 파티에서 너무 많이 먹어 이질로 죽었다는 설이 유력했으나, 청나라 말 중국에서 생활했던 에드먼드 트렐로니 백하우스의 책에 서태후가 군부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총격에 의해 죽었다고 기술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물고있는 보물을 빼기 위해 입은 찢어지고 다른 보물이 있을까 몸은 난도질 당했다


사인이 어떻든 간에 서태후는 죽어서까지 부를 탐해 자신의 능을 동치제의 능보다 더 크게 만들었고 온갖 보물들을 자신의 묘에 넣었다. 진귀한 보물인 야광명주를 입에 물고 관에 들어갔지만 도굴꾼에 의해 묘가 파해쳐지고 시신의 옷이 벗겨진 후 훼손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권력 무상이다. 지금 권력에 목매달고 있는 인간들도 이를 좀 알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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