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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정희왕후와 조두대 조선의 최순실게이트

정희왕후는 세조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다. 세조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예종은 겨우 16개월 만에 병으로 죽는다. 예종이 죽자 정희왕후는 성종을 왕위에 올렸는데 겨우 13살이었다. 이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정치감각은 있었으나 심각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건 바로 까막눈이라는 것이다. 한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조선의 행정문서는 전부 한문으로 되어있어 한문을 모르는 정희왕후는 곤란했다. 물론 한글로 번역해주는 것을 보면 되지만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문을 잘 아는 여성 측근을 두었는데 이 여자가 몸종인 조두대였다. 



그로인해 국정에 필요한 모든 문서들이 조두대를 거쳤고 이로 인해 다른 조직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조두대가 모든 것을 총괄하니 자연 권력실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권력이 집중되니 자연 조두대는 부정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정희대비를 정치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상 조두대의 정치감각이 뛰어난 것이다. 정희대비 이전 세조때부터도 신임하고 중용한 것을 보면 꽤나 똑똑했던 것 같다. 이 재능을 좋은 일에만 사용하면 모르겠지만 권력이 집중되자 청탁을 받고 사업을 벌였다.



물론 자신은 정희대비의 측근으로 궁에서의 역할이 있기때문에 자신의 조카를 이용해 각족 이권에 개입하게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렇게 크게 일을 벌리니 아무리 권력이 커도 궁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조두대가 자꾸 거론될수록 정희왕후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거대해져버린 권력이 되어버린 조두대의 영향력은 정희왕후가 죽을때가지 줄지 않았다. 정희대비 이후를 준비해 인수대비의 신임을 확보했기때문이다. 조두대의 이런 권력은 연산군때까지 이어졌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무지한 대통령의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 있는 지금 이 상황이 왠지 낯설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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