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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송나라 맹황후 - 인덕을 갖고 견디면 복이 되어 돌아온다

맹황후는 송나라 (북송)의 철종의 황후로 소자황후, 원우황후, 융우태후, 소자성헌황후 등 다양하게 불리웠는데 폐위와 복권을 반복한 특이한 이력의 황후였다. 그러나 이렇게 폐위가 된데는 본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왕의 무지와 주변의 모함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안좋은 상황들을 견뎌냈다. 결국에는 해피엔딩. 새옹지마의 끝을 보여준다.


<맹황후>

맹황후는 명주 사람으로 명문집안 출신이다. 송나라 7대 황제인 철종이 겨우 10세에 즉위를 해서 태황태후인 고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17세 되던 해 고태후에 의해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황후로서의 품행을 두루 갖추어 고태후와 향태후 두 태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외모가 평범하여 색을 밝혔던 철종은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송철종>


송철종은 유씨라는 후궁에게 흠뻑 빠져 있었는데 후궁 유씨는 외무가 출중했으나 성격이 모질고 욕심이 많았다. 고태후는 철종에게 이런 좋은 부인을 얻는 일이 쉬운것이 아니라며 철종이 맹황후에게 관심을 안보이는 걸 타일렀으나 철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태후가 사람보는 눈이 있었는지 맹씨를 보며 현숙하나 복이 없구나. 하지만 나중에 나라에 변이 생기면 감당할 사람은 맹씨일 것이라며 탄식했다. 


<남겨진 이미지들만 봐도 맹황후가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던 듯 싶다>


정말 복이 없었는지 황후로서의 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슬하에 아이가 없었는데 님을 봐야 뽕도따지 철종이 찾지 않는데 어떻게 자식을 볼까. 그래도 어찌어찌 아이를 가져 딸을 하나 낳았는데 복경공주다. 맹황후는 어렵게 얻은 자식이라 아들은 아니었지만 복경공주를 극진히 아꼈다. 남편에게 사랑을 못받으면 자식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자식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다 복경공주가 3세때 원인모를 병에 걸리고 말았다. 좋다는 약은 다 써봤으나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다 해도 안되니 맹황후의 언니가 도교의 도사에게 부탁해 부적을 써왔다. 그러나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나라의 궁에서 부적같은 사술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맹황후는 스스로 이것을 철종에게 고백하고 부적을 태워버렸다. 철종도 딸을 위하는 마음을 이해했는지 이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이런 노력에도 공주는 그만 죽고 말았다. 


<도교의 도사>


그런데 문제는 유씨였다. 황후의 자리를 노리는 유씨는 부적문제를 끈질기게 걸고 넘어졌다. 이것을 사방에 떠벌리고 심지어 부적을 써 황제를 저주하려 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철종은 원래부터 유씨를 편애했기때문에 대노하여 이를 조사하게 시켰다. 유씨는 맹황후의 측근들을 모질게 고문하도록 시켜 거짓 진술을 받아냈느데 그 고문이 참혹해 죽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팔다니라 혀가 잘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일로 맹황후는 폐위되었다.


<나쁜짓 하면 천벌받는다>


유씨는 철종의 아들 무를 낳고 원하는대로 황후가 되었다. 이가 소희황후다. 그러나 하늘이 살아있는지 소희황후를 가만두지 않았다. 황후가 되고 1개월만에 아들 무가 요절을 해버렸다. 철종은 매우 슬퍼하였고 이것이 원인이 되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후사가 없어 그 뒤를 이어 동생 휘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섭정을 하는 향태후에 의해 맹씨는 다시 궁으로 모셔져 황후로 복권을 한다. 그러나 이미 유씨가 원부황후가 되어 있었기때문에 맹씨는 원우황후로 불린다. 


<그냥 폐위가 아니라 승려로 만듬>


이제 인생 좀 피나 했지만 운명이 모진지 향태후가 다음해 갑자기 병사를 하고 송휘종은 원우당사건에 연류된 맹씨를 다시 폐위시켰다. 맹씨를 미워한 유씨가 관련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씨는 맹황후가 폐위돈 얼마후 죽었다. 그후 맹씨는 25년간이나 궁 밖에서 생활을 했는데 힘든 나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는 않게 되었다. 당시 금나라가 송을 침략했는데 북송을 멸망시키고 황궁 사람들을 모두 잡아갔다. 맹씨는 폐위된 사람이었기때문에 잡혀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


금나라가 물러간 후 조구가 남송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맹씨를 원우태후로 모셨다. 후에 융우태후로 명칭을 바꿨고 황태후로 모셨다. 반란과 금의 재침략을 버티며 계속 맹황후를 모셨다. 아마도 맹황후의 존재가 사람들을 단합시키고 모으는데 도움이 되었기때문일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였겠지만 맹황후의 인품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고태후의 예언대로 나라의 변을 맹황후가 감당해낸 것이다. 조구는 맹황후를 극진히 모셨고 59세에 병사를 하게 되자 그녀의 영패를 송철종의 옆에 모셨다. 단순히 모신것이 아니라 유씨보다 높은 자리에 놓았다. 그토록 맹황후를 괴롭혔던 유씨는 죽어서 맹황후의 밑에 놓이게 되었다. 조구는 그녀에게 소자성헌황후라는 칭호를 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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