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임진왜란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안의와 손홍록

모두 사라져 버릴 뻔한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최고의 역사서로 역대 왕들의 행적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국보다. 이 방대한 역사서를 기록한 것도 대단하지만 잦은 외침과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도 보존이 되었다는 것도 놀랍니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보존에는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인물이 대표적으로 주도했는데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컴퓨터 데이터들은 백업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는 불의의 사고로 데이터가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글은 전세계에 백업 서버를 두어 멸망 수준의 전 지구적 사고가 나지 않으면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도 철저한 백업 작업을 했다. 항상 4부를 인쇄해 한양이 춘추관에 한부를 두고 3부는 지방의 서고에 보관했다. 이를 또 3년에 한 번씩 꺼내 말려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으니 정말 철저한 관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이런 관리도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재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약탈이 일인 오랑캐들과 왜놈들에게 이런 물건이 걸리는 태워버리거나 반출되기 십상이었다. 임진왜란도 다르지 않아서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의 실록들이 방화로 불타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전주사고의 실록뿐이다. 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지켜낸 이가 안의와 손흥록이다. 물론 실록이 몇 권짜리 책이 아니기 때문이 이것을 숨기거나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니 이것을 지켜낸 것은 이름 모를 많은 민초들의 힘이었다.

도성만 함락하면 쉽게 전쟁이 끝날 줄 알았던 왜놈드은 한양이 함락되었지만 끊임없이 들고일어나는 의병들에 당황했다. 그리고 전라도가 함락되지 않은 건 왜놈들에게 큰 난관이었다. 이에 당시 전라도의 핵심지역인 전주로 진군을 했다. 만일 전주가 함락되고 도자기나 들고 갈 줄 안 미개한 왜놈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태워버리면 큰일 날 일이었다.

이 전주사고이 실록을 옮기려면 한 두 사람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한번 서책을 옮기려면 마차 50여 대에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6월 왜군이 전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전라감사 이광은 실록의 피란처에 대해 대책 마련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땅속에 묻으려 했으나 이 계획을 취소하고 깊은 산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상황이 긴박 해지자 태인에 살던 유생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이 걱정되어 집안의 종들 30여 명을 이끌고 전주 경기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전주역사박물관 보존을 위한 실록의 이동장면>

국가의 병사들도 아니고 시골의 선비들이 실록을 옮겨 보관하려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궤짝으로 60여 개 분량인데 수십 마리의 말과 소와 인원이 동원되었고 서책을 실어 7일 동안이나 옮기느라 애를 썼다. 이후 은봉암도 안심이 안되어 더 깊숙하고 은밀한 장소인 비래암으로 실록을 숨겼다. 이때는 승려 희묵이 이끄는 승군과 무사 김홍무, 이름 없는 사당패들까지 동원되었다.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이 실록을 옮겼다.

이 와중에 안의와 손홍록이 대표로 언급되는 것은 그들이 먼저 실행을 했고,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면서 실록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옮겨 놓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재를 털어 그 깊은 산중에서 실록을 지켰는데 본인들이 직접 그 곳에서 자리 잡고 지켰다. 당시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였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내장산에서 끝까지 실록을 지켜냈다.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터>

이때 내장산으로 옮긴 실록을 지키면서 안의가 기록한 책이 '난중일기초'다. 실록은 내장산에 약 370여일간 보관되었다가 전쟁이 공백기에 접어든 이듬해(1593) 4월에 왜군이 철수한 직후 아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는 다시 강화도 마니산으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묘향산으로 옮기게 되었고 전란이 끝난 후 보존된 것을 기반으로 4개 간행본을 새로 인쇄하여 아예 깊은 산중에 서고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옮길 필요 없이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으로 임란 중에 내장산에 보관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도심지보다는 아무래도 깊은 산중이 적들이 손에서 더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모든 말 하나하나를 다 기록했다>

일단 춘추관에 1부를 보관하고 나머지는 간행본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마니산에 서고를 지어 보관하게 되었다. 이렇게 난리통에도 안이와 손흥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실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 151호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티움 프로젝트 발행글을 구독하기, 네이버, 페이스북, 트위터, RSS로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 공감 하트♡ ) 누르시는 당신은 센스쟁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