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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움 컨텐츠/역사와 야사 사이

폐비신씨, 연산군이라는 남편 잘 못 만난 죄

연산군의 여자하면 퇴폐적인 향락을 공유한 장녹수가 떠오른다. 그러나 연산군에게는 좋은 아내가 있었다. 바로 신씨. 중종반정으로 폐비 신씨가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폐비들은 자신이나 친인척의 과오로 된데 반해 신씨는 연산군이라는 희대의 광인 남편으로 인해 폐비가 되었다. 그야말로 남편 잘 못 만난 죄. 그래서 그런지 폐비가 되고 집안이 몰락했어도 신씨는 탄압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우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건 신씨가 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만 잘 만났어도...


<드라마 왕과 나의 폐비 신씨>


폐비 신씨는 1476년 생으로 연산군의 정비다. 장성공 신승선의 딸이면서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이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이다. 남편인 연산군은 칠촌 조카뻘이다. 자신을 폐위시킨 중종은 이복 시동생이면서 형수이자 처고모. 그녀는 세자빈 간택을 통해 연산군의 세자빈으로 입궁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바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는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다고 했다.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와 사람됨과 인품을 알 수 있다. 연산군만 잘했어도 존경받는 왕비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연산군때문에 마음 편한날이 없었을 듯>


신씨는 연산군이 미치고 포악한 행동을 일삼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방탕한 생활을 하는데 대해 근심을 했으며 연산군에게 울며 간곡히 간하기도 했다. 연산군이 막나가기는 했어도 신씨를 어쩌지는 않았다. 이런 미친놈도 해꼬지 하지 않았으니 신씨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씨는 연산군의 행동에 성내지 않고 차분히 만류하는 성격이었을 것이다. 



이런 신씨를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과 연산군 반대파들조차 내치지 않았다. 중종은 폐비가 된 신씨를 빈의 예를 갖추라고 했다. 보통 이런 반정으로 왕이 죽을 때 비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독살당했고 장녹수는 참형을 당했지만 신씨는 그대로 살아남았고 대우 받았다. 집안에서 일하는 노비들조차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중종반정에 동조하지 않은 신씨의 오라버니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두 아들조차 유배를 떠난 후 피살 되었음에도 신씨는 살 수 있었다. 그녀의 선한 성품과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산군이 잘했으면...>


미쳐서 신씨의 말을 지지리도 안들었던 연산군마저도 죽기 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남편만 잘 만났어도 후세에 왕후 시호가 길이 남았을 인물이다. 폐위 된 비참한 왕으로 죽은 후 교동에 묻힌 연산군의 시신도 중중에게 이장해줄 것을 부탁했다. 중종은 이를 허락해 대군의 예를 갖춰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 자리로 이장했으며 신씨는 죽은 후 연산군의 옆에 묻혔다. 연산군 살아서 옆자리는 장녹수가 지켰지만 죽은 후에는 신씨가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신씨에게 잘 된건지는... 신씨의 부탁이었으니 잘 된 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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